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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1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1_10

by 조랑말림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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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는 25년을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 돌아보면 긴 시간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화살이 활 시위를 떠나 과녁에 맞을 때까지 날아다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시위를 떠나는 순간이 출생이면 과녁에 맞는 순간이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내가 맞이할 과녁이 뭔가 의미 있는 것으로 장식되어 있기를 바라보지만, 그저 흘러가는 세월 속을 걷다 보면 모두 덧없어 보인다.

 내가 근무한 회사는 의료장비 부품을 만드는 제조 회사다. 중소기업이라 인원은 많지 않지만 70 ~ 80명 정도의 근무자가 출근해서 의료장비 부품을 만들고 선별하고 포장한 후 트럭에 실어 출하한다. 내가 맡은 업무는 행정 처리 업무였는데, 3년 정도 공군 경리장교 경험이 있던 터라, 큰 무리 없이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약간의 어려운 점이 있다면 각종 행정 처리를 전적으로 나 혼자 처리한다는 점이었다. 70 ~ 80명의 한달 간 교대 근무 일정을 만들고, 휴가나 조퇴, 지각, 결근 등 근태 처리를 하고, 사직, 휴직, 복직 등 인사 업무와 야근, 휴일, 연장 수당과 같은 급여 관련 업무, 출장비, 접대비 등 각종 비용 처리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3년 전부터 조직이 조금 커지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나와 같이 일하는 사원이 한명 추가되었는데, 이 직원이 어느 정도 업무 능력이 갖춰지면 나는 없어도 된다는 이야기다.

  한달, 분기, 반기, 연간으로 보면 사실 매번 비슷한 업무들이 비슷한 시점에 진행되는데, 하루하루를 무슨 벽돌 격파하 듯 해치워야 할 일들이 쌓여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 책상을 한번 '쓱쓱' 닦아내고는 달력에 표시된 근태, 급여, 비용 처리 마감 날짜를 확인한다. 마감이 임박한 업무들부터 하나, 둘씩 정리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월급날이 오고, 월급날 기분 낸다며 가은이와 근처 중국집에서 고추잡채를 시켜 먹으며 전에는 맛보지 못한 안락함을 즐겼다.

 다행히 꼼꼼하게 업무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 과장까지는 무리 없이 진급했다. 누락 한번 없이 진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에 비해서는 빠르게 진급을 했다.

 내가 군대에서 전역하기 1년 전 엄마는 집에 돌아오셨다. 빚이 어떻게 정리되고 앞으로 더 이상 어떤 문제가 생길지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큰형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처럼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오거나, 전화가 새벽시간에 울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모든 집안일들이 빠르게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 잘못된 것들을 회복이나 하려는 듯이, 그렇게 평온이 찾아온 듯 했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닥쳐올 비바람 직전에 나타나는 잠깐의 여유로움 이었을까?’

2003. 7월 내가 과장 진급을 한 다음해 여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고 흐린 날이 많았다. 아버지를 모시고 경모공원으로 가는 날도 그랬다.

"여보세요"

"현우야 병원으로 와야겠다" 핸드폰 너머 큰형 목소리가 약간 상기된 듯 울렸다.

 "나 근무 중이야, "

 "아버지가 응급실인데,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 병실 알아보고 있고, 병실 나오면 바로 옮기실 꺼야"

 "? 어젠가, 그젠가 퇴원하지 않으셨어?"

 "3일전에 퇴원하셨는데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지셨어, 여튼 빨리 와"

 C형 간염이 간암으로 진전되면서 2년 전부터 약 6개월 간격으로 간암 시술을 받으시던 아버지가 오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이다. 일주일전 간암 시술을 받으셔서, 퇴근 후 병원에 갔었는데, 4번째 시술이라 그런지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만 하셨다. 이번 4번째 시술이 특이했던 점은 3번째 시술 후 좀 빠른 시점에 받으셨다는 점(6개월 이상 간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3개월만에)과 통상 퇴원이 시술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 오전이었으나, 이번에는 하루 더 계셨다는 점이었다. (몸 회복이 좀 더뎌 하루 더 병원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의사가 했다) 난 사실 좀 이른 시술이 걱정스러워 의사에게 잘 이야기해서 시술 일자를 좀 늦추는 것이 좋겠다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지만, 아버지는 "의사선생님 말 잘 들어야지, 걱정하지마! 간단한 색전술이야" 라며 의사가 지정한 날짜에 4번째 시술을 받으셨다.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덮은 이른 오후,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시간에 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파도 치듯 가슴을 쓸어 내리고 나니 오늘 해야 할 일, 내일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별일 없겠지, 빨리 다녀와서 처리하지 뭐' '팀장님한테는 아버지 때문에 급히 병원에 다녀오겠다 라고만 했는데... ...'

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으로 가면서 회사 업무 걱정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인공호흡기를 기도에 삽관하신 채로 병실에 누워 계셨다.

큰형이 얼굴을 쓸어 내리며 한마디 한다. "어 왔어, 방금 병실 자리가 나서, 올라 왔다. 좀 안 좋으셔"

엄마와 작은형은 병실 바깥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울고 계셨다.

 '아버지' 난 병실 바깥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있는 병실 안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신 거래, 갑자기! 어제까지 식사 잘 하시고 몸도 많이 좋아지셨다고"

 "몰라, 복수가 찼대. 여기도 왜 그런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웠던 창밖에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를 진료하고 시술했던 주치의가 젊은 의사 2명과 함께 왔다.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패혈증 증상을 보이시고, 자발 호흡이 불가능한 생태입니다. ... ... 이번 시술이, 좀 빠른 시점에 진행된 것이, 영향을 준 것도 같습니다. 연세가 있으신데... ..."

 아버지는 다음날 새벽, 71세 일기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연신 "고생만 하다가, 고생만 하다가" 하시며 우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경모공원으로 갔다.

경모공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전에 분양 받은 묘원이다.

직업군인으로 20년간 복무하신 아버지는 대전에 있는 현충원으로 가실 수도 있었으나, 고향 땅이 조금이라도 가깝고, 북녘이 보이는 경모공원을 선택하셨다. 묘자리를 분양 받으신 후 나와 함께 가봤는데, 북녘이 보이는 언덕 위, 햇살 잘 드는 곳에 서서 "이쯤이면 좋겠는데"라고 하셨던 일이 생각났다.

 

"자리를 지정할 수 있어요"

"아니, 죽은 순서대로 와서 묻히는 거야"

"그럼 아버지는 저~기 밑에 쯤 이나 ~"

말끝을 흐리자 아버지는 씩 웃으셨다.

아버지는 쓸쓸해 보이는 눈길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시며 서 있던 그 자리, 언덕상단에 묻히셨다.

 

평안북도 강계군 화경면 고인동이 고향이며, 만석꾼 최씨 가문의 막내아들이자 장손인 아버지는 14(중학교 1학년) , 친구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온 고향을, 65년 동안 그리워 그리워 하시다가, 끝내 돌아가지 못하시고 경기도 파주 언덕에 묻히셨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잘 만나셨어요'

<10화 끝, 11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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