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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1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1_8

by 조랑말림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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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40개월을 꽉 채우고 군대를 제대 한 후, 직장을 구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러 군데 시험을 보고 면접을 봤으나, 최종 합격 소식을 전해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가자 나의 자신감은 점점 바닥으로 향해갔고, 사람들 눈길 조차 피하고 싶은 초라한 마음이 되었는데, 이를 달래주는 이는 나의 여자친구 가은이 뿐이었다.

 이가은.

 가은이 하고는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다. 대학시절 나는 연애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결혼에 대해서도 비혼주의를 표명하기 바로 전단계 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돈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집안 분위기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도 싫었지만, 아버지조차 힘겨워하는 가정을 누군가와 같이 꾸려 나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친구도 없이 대학교 1,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이 된 어느 봄날, 나는 삼수를 하고 대학교에 들어간 고등학교 친구 종혁이를 위해 소개팅을 주선했었다. 사실 소개팅이나 미팅 같은 것도 주선을 하거나 참석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같은 과에 있는 여자 동급생 지수가 유아교육과에 있는 자기 친구를 소개팅 시켜줄 사람 없냐고 물어봤고, 난 그 자리에서 종혁이가 떠올랐다.

 유아교육과에 퀸카라고 떠벌리며, 반신반의하는 종혁이와 함께 강남역 근처에 있는 카페 앞으로 갔다. 지수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카페 입구 앞에서 인사를 하더니 내 팔을 끌고 문제가 생겼다며 속삭인다.

"왜 뭔 일 있어?"

"미안한데 친구가 일이 생겨서 못 왔어"

"그래 그럼 뭐 전화를 미리 하지, ... ...  밥이나 먹고 집에 가자"

지수가 주저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내 친구 대신에 다른 애랑 같이 왔어"

"?? 아 그래, 그럼 어쩌지"

나는 종혁이에게 선택권을 줬다. 원래 나오기로 한 지수 친구, 퀸카는 못 왔고, 다른 이가 대신 왔으니 종혁이가 결정하라고, 다음에 퀸카랑 다시 소개팅을 하든가, 그냥 오늘 소개팅을 하든가 정하라고 했다. 종혁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한번 씩 웃더니 "담에 보자, 난 기훈이하고 당구나 치러 갈게" (기훈이도 고등학교 친구다)

 그렇게 종혁이가 꾸벅거리며 미안해하는 지수의 사과를 받으며 카페 입구에서 황망하게 떠나자, 지수와 나는 카페에 남아있는 소개팅 대신 나온 이가 생각났다.

 "어쩌지" 난 지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야, 친구가 같은과 친구한테 대신 나가달라고 부탁 한 거라서, 나도 오늘 처음 봤어" 지수가 난감한 표정이다.

"그래, 그럼 인사만 시켜주고 넌 빠져, 내가 상황 설명 잘할 게"

 그렇게 들어간 카페 안에서 가은이를 만났다.

 긴 생머리에 아담한 체구,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낀 가은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앉은 채 나를 맞았다. 지수를 보내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가은이는 별 반응이 없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밥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가은이 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의도치 않은 장소에서 의도치 않은 시간에 의도치 않은 사람들이 만나게 된 것이다.

 난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는데, 아무런 불평 없이 그 자리를 지켜줘서 인지, 아니면 묵묵히 내 주절거림을 잘 들어줘서 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그 후로 시간과 돈이 허락할 때면 가은이를 몇 번 만났다.

그 해 여름방학 난 종혁이와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인 준근이와 같이 간 지리산등산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비가 많이 오던 1990 8월 어느 여름날, 등산 이라고는 뒷산 정도만 알고 있는 나와 설악산을 종주했다며 자랑하는 준근이, 그리고 체력은 항상 자신 있어 하는 종혁(그 퀸카와의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한번 어긋나니 ... ...)이 이렇게 세 청춘은 34일 코스로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결심하고 남원행 비둘기호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거의 텅 비어있는 기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비몽사몽으로 밤을 지샌 약 10시간 후 남원에 도착했다. 여관에 짐을 풀고 다음날부터 시작될 지리산 종주를 결의하며 소주에 환타를 타서 마시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옅은 산 안개를 뚫고 지리산에 올랐다. 노고단까지는 버스가 있어 쉽게 도착했다. 노고단부터 시작하는 등산 코스는 노고단에서 연하천, 장터목,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코스로, 연하천, 장터목에서 각각 1박씩 하기로 하고, 짐을 챙겼다. 라면 쌀 김치 등 먹는 것과 밤에 깔고 덮을 것들, 코펠, 버너 등 온갖 짐을 등산 배낭에 쑤셔 넣고는 무슨 전문 등산가처럼 길을 나섰으나, 정착 나의 발에는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가 신겨 있었다. '등산 한번 가는데 무슨 등산화를!' 하며 만만한 운동화를 신고 갔지만, 등산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발톱 10개 모두는 피가 굳은 채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노고단에서 연하천으로 가는 길은 고단하고 또 고단했다. 2 ~ 3시간 걷고 나자 친구들은 모두 자기 배낭에 있는 음식물을 먼저 먹어야 한다며 고집했고, 스피커 두개 달린 카세트플레이어는 왜 들고 왔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서 토끼봉을 넘을 때는 더 이상 못 가겠다며 주저앉아버렸다. 뒤처진 나를 더 이상 챙겨줄 수 없었는지 친구들은 "좀 쉬다 와"하며 가버렸고, 나는 토끼봉 어느 바위 위에 배당을 걸쳐 놓고 몸을 기댄 체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때 가은이가 나타난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가은이가 살짝 웃으며 사라지고, 가은이가 사라진 허공 너머로 강력한 태양이 직사광선을 내 뿜으며, 깨어나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은 8월의 열기를 내 얼굴위로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어 늦었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연하천 가는 길을 못 찾을 수도 있다. '나는 여기가 초행길이 아닌가! 자칫하면 어두워 질 수도 있고.'

 배낭을 챙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렇게 혼자 1시간 반쯤을 걸어서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반겨준다.

"잘 찾아 왔네"

"난 너 내려간 줄 알았다."

 연하천, 장터목에서 각각 1,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보고 하산할 때까지 내 머리속에는 그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되었으며, 가은이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천왕봉에서 내려와 지리산을 빠져나가는 길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가은이를 위한 목걸이를 하나 샀다.

 내 발톱이 다 아물기도 전에 가은이를 만나 목걸이를 전했고, 처음 손을 잡고 입맞춤을 했다. 그렇게 가은이는 나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8화 끝, 9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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