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1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1_5

by 조랑말림 2023. 2. 13.
반응형

강남아파트

 

 1977년 눈 많이 내리던 겨울,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000달러 및 수출 100억 달러 달성으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서 중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던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 였으며, 그 다음해인 78년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강남에 있는 역삼동, 압구정동, 청담동 등은 주택계발과 공공시설 확충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로, 이른바 팽창하는 서울시 인구를 받아 줄 수 있는 주거단지 용 계획도시가 마련되고 있었다

 우리가 살게 된 강남아파트는 계단식아파트로 5층짜리 5개 동이 있는 단지였다. 우리집은 2층 맨 왼쪽, 작은형과 같이 사용한 내방에서는 영동대교와 한강 그리고 집 바로 뒤에 있는 놀이터(강남에는 집앞에 놀이터가 있네)가 보였다. 마루쪽 발코니로 나가서 목을 좀 내밀면 남산도 보였으니, 위치는 너무 좋았다. 방은 3개로, 안방은 아버지가 사용하시고, 다른방 하나는 그 당시 중학생에 막 입학하려던 큰형이 사용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올라가는 겨울방학이 아이들 성적에 너무 중요하다며, 공부를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화장실은 하나로 깔끔한 수세식 화장실, 이제 더 이상 어둡고 추운 겨울날 화장실 사용을 위해 집을 나설 필요가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추운 밤 연탄을 갈아야 했던 구식 주택에서 전기 장판 열선처럼 보일러 온수관이 바닥에 깔려 있는 신식 아파트로 이사를 하다니 너무나 신기했다. 다만 엄마가 없을 뿐. 신림동 집에 있던 물건들을 경매하고 집까지 처분했음에도, 엄마가 갚아야 할 돈은 남아있었으며, 받아야 할 돈이 있는 사람들은 가끔 집으로 전화를 해서 엄마를 찾는 적이 많았으며, 아파트 입구 앞에서 서성이며 엄마를 기다리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엄마는 법적으로 이혼하고 가진 재산을 모두 빚잔치로 정리했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엄마 없는 새로운 학창시절을 맞이했다. 엄마는 우리가 강남으로 이사한 3년이 지난 시점 이후부터 가끔 집에 찾아오곤 했는데, 2 ~ 3일 혹은 일주일 정도를 머물고는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절대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며, 나도 어떤 상황인지 캐묻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계속되었는데,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게 되었을 때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가 언제라도 다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안한 마음은 내 마음 한구석에 항상 남아 있었다.

 엄마 없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아버지가 도시락(당시 학교에서는 급식이 없었다)을 싸주시는 경우도 있었고, 집안 형편이 좋을 때는 입주가사도우미 혹은 파출부 하시는 분들을 고용하기도 했었는데, 상황에 따라 있다 없다, 들쭉날쭉하여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기억에는 좋지 못한 일만 오래 남는지 도시락을 못 싸가거나, 학교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담임선생님이 학부모 면담이라도 한다고 날짜를 알려 주시면, 면담 일자를 미루고 미루다 아버지가 선생님을 찾아 뵙곤 했다.

 강남아파트로 이사한 후 국민학교 3학년에 전학을 해서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까지도 키가 크고 날랜 편이라 전학하자 마자 운동부 선생님 눈에 띠어 학교 핸드볼 선수를 했다. 전학한 학교에서 새롭게 만든 운동부로 아마 국가 정책으로 국민학교마다 구기종목을 하나씩 만들기로 한 것 같았다. 하여튼 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생소한 핸드볼을 접했고, 아침마다 운동을 하니 엄마의 부재와 빚쟁이 전화 등은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이때부터 내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인데 국민학교 1학년 때에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내가 3학년 때는 뒤에서 두번째 줄에 앉다가 점점 앞쪽으로 가더니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앞쪽에서 두번째 까지 갔다. 당시는 키 순으로 자리에 앉았고, 다른 아이들은 쑥쑥 크는데 나는 거의 자라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내 키는 176cm인데 이 키는 고2, 3학년 때 갑자기 성장판이 열렸는지 한 동안 자라지 않던 키가 쑥쑥 자랐다. 국민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기간 동안, 불안과 스트레스, 열등감과 좌절감이 내 맘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이 내 성장판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새로운 환경과 편안함을 제공한 강남아파트가, 엄마의 부재와 빚 때문에 신림동을 도망쳤다는 처참한 감정을 내 가슴 속에서 밀어내거나 모르는 일처럼 덮어두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고 시절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눈에 띄지 말고 중간만 하자"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한 학급에 60명이 공부하던 시절, 엄마의 부재와 불안정한 우리집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 사이에 묻혀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아이들을 피해서 조용조용

 내가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고 떠들었던 곳은 학교 운동장 혹은 아이들과 모여서 공차기를 하던 공터였다. 국민학교 시절 나의 유일한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서 축구선수를 하고 싶으니 축구부가 있는 국민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고 했었다. 당시는 유소년 축구나 클럽 축구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축구선수를 하려면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며칠 고심하던 아버지는 "안돼" 단 한마디만 하셨다. 난 그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고.

 나의 꿈은 날아갔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아 아이들과 모여 축구하는 것을 즐겼다. 운동장에서 공터에서 축구공과 함께 달리면 내 앞에 놓은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 그렇게 공을 차며 노는 것에 진심인 내가 싫어하는 학교 행사가 있었으니, 소풍과 운동회였다. 소풍과 운동회 모두 야외활동으로, 활발한 성격이었던 내가 좋아할 여지는 많았으나, 두 행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커다란 문제는 도시락이었다. 당시 '김밥천국(!!)'은 없었고, 소풍과 운동회에서 먹을 도시락 준비를 못할 것이 뻔했던 나는 소풍 / 운동회 일정이 나오는 시점부터 우울모드로 들어가곤 했다. 소풍 / 운동회 당일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빵과 환타를 사서 가기도 했지만, 당시 치맛바람이라고도 불렸던 학부모회 소속 어머니들이 선생님들을 위해 준비한 각종 고명과 음식으로 채워진 김밥과 반찬을 마주하는 것은 불편했다. 같은 반 아이들 부모님들이 집에서 정성껏 마련한 과일과 음식들을 내보이는 자리는 나의 초라함을 더욱 선명하게 들어내는 조명과 같았다. 그런 자리가 차려지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슬슬 눈치를 보며, 이곳 저곳 배회하다. 식사시간이 다 지나가고, 보물찾기를 할 때 쯤 돌아오곤 했는데, 단 한번도 보물을 찾아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보물을 찾으면 다른 아이들 앞에서 선물을 받아야 하니까. (그럼 누군가 그러지 않을까,  '너 밥 먹을 때는 안보이더니 보물 찾고 다녔어?')

 운동회에서도 단체전만 참석하고 개인전을 할 때는 관심 없는 척 뒤쪽으로 쑥 빠져서 구경만 했다. "눈에 띄지 말고 중간만"

 나의 초, , 고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한번 더 전학을 했는데 이번 전학은 그 원인이 팽창하는 강남 때문이었다. 내가 3학년 때 전학했던 학교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우리집에서  가까운 쪽에 국민학교가 새로 생기자, 사는 집 위치를 기준으로 행정 편의상 먼 곳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을 새로 생긴 학교로 전학 보낸 것이다. 새로 생긴 학교는 그렇게 전학생 맞이하며, 학급을 꾸렸다. 신림동에서 강남으로 전학 와서 핸드볼부외에는 별 다른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또 한번의 전학에 시큰둥했다, 키는 점점 작아지는 것 같고, 친구들과도 서먹하고, 공부도 뭐 중간을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니 ... ...

 새로 전학간 학교는 청담동 언덕 위에 있었는데 특이하게 교문이 좌우에 두개있었다. 왼쪽에 있는 교문은 압구정동에서 오는 아이들이 이용했고, 오른쪽에 있는 교문은 청담동쪽에 사는 아이들용이었다. 그 당시 압구정동에는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건설되었는데, 이 아파트단지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전문직 종사자가 많아 소위 좀 있는 엘리트 집 아이들이었으며, 청담동쪽 아이들은 상가와 주택단지 지역에 사는 아이들로 단독 주택이나 신축 빌라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과 장사하시는 부모님과 사는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인지 압구정아이들과 청담동아이들은 따로 어울리곤 했다. 국민학교 5, 6학년 그 어린 눈에도 빈부차와 분위기 차이는 선명하게 보였다.

 하루하루 불안정하고 혼란스럽던 시간들은 내가 점점 커지면서 사그라들었다.

 두발자유화와 교복자유화가 시행되었던 중학생 시절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장난도 많이 치고 다녔지만, 엄마의 부재는 마음 한 곳을 억눌렀고, 그 흔한 영어, 수학학원 한 곳을 다니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의 부재는 한결 가벼워졌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쁘셨고, 큰형은 대학생이, 작은형은 대학 입시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 나도 이때부터 공부에 돌입하기는 했는데, 그렇게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물고기 양식업을 하신 다며 남해안 어느 섬에 출장을 2 ~ 3달 다녀오시는 경우도 있었고. 엄마도 집에 오는 횟수가 늘고,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엄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저 다들 묵묵히 엄마에게 있었던 일들을 외면 했을 뿐.

 

<5화 끝, 6화 계속>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