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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2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2_10

by 조랑말림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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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잔치, 보증, 세운상가

주택 담보 대출 받으시려면 보증인이 있으셔야 합니다.” 은행 남직원이 사무적 말투로 나지막이 말한다.

주택 담보인데 보증인이 필요합니까?” 무순은 격앙된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최대한 천천히 물었다.

네 보증인이 없으시면 대출이 안되요. 지난번에도 설명 드린 내용입니다.” 직원이 볼펜을 내려놓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마감한다.

무순은 대출 서류를 챙겨서 서울은행 본점을 나섰다. 눈앞에 플라자호텔이 웅장하게 서있다.

누구한테 부탁을 하지?’ 무순은 난감했다. 엊그저께 수원 사는 금옥 외사촌 오빠에게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출 보증을 부탁했는데 거절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금옥의 큰오빠인 김수명 소령이 급사했을 때와 장모님 돌아가셨을 때 뵈었던 터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금옥 작은오빠는 미국으로 이민 간 상태이니 한국에 남아있는 금옥 친척 중에는 제일 가까운 친척이었다. 수원에서 작은 과일가게를 하는 그 사촌은 무순을 과일가게 밖에 한참 세워 두고는, 아내 눈치를 살피며, ‘미안하네, 미안하네라는 말만 계속했다.

호기롭게 군 사무실에 있던 짐을 정리하고, 군복을 벗고 나올 때,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을 하면서 모아둔 돈과 퇴직금을 합쳐 신림동에 집을 짓고, 신림상가 1층에 이불 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세상의 모든 운이 나에게 쏟아지는 듯 느꼈었는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아이 셋을 데리고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한탄이 터져 나온다.

그때 금옥이 계모임을 하며 곗돈을 받으러 돌아다닐 때 말렸어야 했는데셈이 정확하지 않고, 사람 잘 믿는 금옥이 곗돈 관리를 한다고 했을 때 시큰둥하게 별일 없겠지 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놔둔 것이 무순은 못내 아쉬웠다.

무순은 빚의 규모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신이 잘 해결하겠다며 집을 나가서 7일째 연락 두절이 된 금옥이 빚에 대한 내역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어림 짐작으로 신림상가회 상인들 대상으로 계모임을 두개는 하였으며, 계모임당 인원이 적어도 20명이라고 보고, 한명이 타기로 한 곗돈을 100만원으로 계산하면, 총 규모가 4천만원은 될 것 같다.

1977년 강남 30평대 아파트 분양가가 1,200만원 내외였으니, 4천만원이라면 큰 돈이다.

신림동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세간살이도 다 팔렸다. 빚쟁이들이 더 이상 무순에게서 돈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금옥과는 이혼을 했다. 이혼 처리 후 금옥이 자기도 받아낼 돈이 있다며, 집을 나가 소식이 끊어지자, 무순은 아들 셋을 어찌 키워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단란했던 가정이 한순간 풍비박산 되었다.

무순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살집을 알아보니, 강남 신축 아파트가 은행 대출을 받아 입주 가능했으나, 보증이 필요했다.

남쪽에는 일가 친척도 없는 고아 같은 무순에게 보증인을 세우라는 것은 대출을 해주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무순은 하는 수 없이 고향 친구 근창을 찾아갔다. 근창이는 세운상가에서 가스레인지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가스레인지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한 다음 소매나 도매로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근창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풀이 죽은 무순을 보고 캐묻는 근창에게 빚쟁이 피해 도망간 아내 이야기, 아직 어린 국민학교 6학년, 4학년, 2학년 아들들 이야기, 경매로 넘어간 집 이야기 모두를 털어놓았다. 근창은 며칠 시간을 달라며 좀 어려울 듯 이야기를 하더니, 이틀 후에 보증서에 인감도장을 찍어서 나타났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무순에게 세운상가에서 가스레인지 장사를 도와달라는 이야기 더 붙이면서 말이다.

무순은 너무 고마웠다. 대출보증과 일자리가 한꺼번에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이 생기다니, 무순은 하늘이 돕는 것 같아 너무 기뻤다.

 

1977년 세운상가는 주상복합단지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구조였다. 1~ 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아파트와 같은 주거 공간이었다. 상가에서는 전자제품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는데, 녹음기, 카세트, 카메라와 LPG 관련 기구, 부품들이 판매되었다. 근창이 하는 가스레인지 장사는 정확하게 말하면 LPG 기구 유통업이었다.  가스레인지, 가스보일러가 보급 되고, 음식점과 가정집에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LPG 관련 기구, 부품 매출이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무순이 세운상가로 처음 출근할 날에도 새롭게 자리잡은 상가들이 물건을 들여놓고, 손님들을 맞이하며, 매우 분주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장사는 활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근창이는 매일 싱글벙글하며 전화를 받았고, 매출 전표를 정리하고,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무순도 돈이 점점 들어오니 신이 났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근창이가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라며 한 사람을 소개해 줬는데, 인천에서 가스레인지 공장을 하는 백성모 사장이었다. 백사장은 사람이 소탈하고 친근해서 아는 이가 많았으며, 근창이 와도 죽이 잘 맞았다.

백사장은 세운상가에도 직영 대리점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대리점 영업망을 확대할 계획이라면서 무순에게 대리점 개설과 영업조직 관리를 해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왔다. 평소 무순의 일 솜씨와 사람됨을 좋게 본 것이다. 무순은 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나, 자신에게 매우 좋은 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사업체를 꾸리고 싶었던 무순은 며칠 뒤 백사장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순은 백사장에게 안정된 현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무순의 속 마음은 달랐다. 무순은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다. 무순이 근창이 밑에서 1년 동안 꼬박꼬박 저축을 하며 돈을 모으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제 앞으로 1년 정도만 더 모으면 내 날개를 펼칠 수 있으리라이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무순의 눈에는 돈이 될 만한 사업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다만 그것을 실현시켜 줄 자본이 부족하니, 그것만 충족되면 널려있는 돈을 다 쓸어 담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적금 통장 잔고가 점점 늘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순의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엄마없이 무탈하게 자라는 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오늘은 집에 갈 때 현수가 좋아하는 양과자를 사 가야겠다.’ 무순은 양과자를 보고 달려들 아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계에 걸려있는 시계 바늘이 오늘따라 더디게 가는 것 같다.

<10화 끝, 11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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