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2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2_3

by 조랑말림 2023. 3. 6.
반응형

한글과 단오

"한글??  무슨 수업이지"

근창이 혼잣말을 하듯 무순을 쳐다본다.

소학교 3학년이 되자 무순과 근창은 같은 반이 되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니 2년만이다. 소학교 한 학년에 단 2개반만 있었으니, 올해 아니면 내년에 같은 반이 되는 것은 이상하지도 않다.

무순도 근창을 바라보며, "글쎄"하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때 교실 앞문이 열리며,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선생님이 나타났다.

선생님인 것을 직감한 반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친다.

"키오츠케"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며 "앉아요" 한다.

'일본말이 아니고 조선말이다.' 무순은 갑자기 긴장했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다니'

"인사는 내가 먼저 하지"

선생님은 칠판에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썼다 '김훈민'

"지금 너희들은 읽지 못하겠지, 김훈민 선생님이다. 난 너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근창이 갑자기 손을 든다.

"어 그래 뭐 궁금한 거 있나"

"센세에노갓코오데와초오센고오 ~~"

"선생님 수업시간에는 조선말을 사용한다. 한글은 조선말을 읽고 있게 하는 거니까!!"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담임선생님한테 혼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모음과 자음을 배우도록 하자. 교과서가 없으니, 선생님이 판서한 것을 받아쓰도록 해"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무순은 한글을 만나자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내 '조선말을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었구나!' 하며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적 무순은 일본어를 먼저 배우고, 한글을 소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배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으나, 어른이 된 후 나라를 빼앗기면 말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나라가 없으면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갖지 못하게 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1942년 음력 55, 단오.

수릿날이라고 불리는 이날은 봄 농사인 파종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는 날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조상님들께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고, 동네에서 제일가는 장사를 뽑는 씨름 대회를 하며 풍요를 기원하는 날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수릿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나타내며, 단오 행사를 하지 말라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는 황국신민화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만큼은 치르고 싶어 했고, 제사 후에 간단하게 음식 나눠 먹기를 원했다.

응수는 사촌과 이웃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그마한 제사상을 차릴 수 있도록 쌀 10가마니를 내주었다.

수릿날 아침, 화경천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동네 어귀, 나지막한 언덕에 제사상이 차려지고 동네 사람들 약 100여명이 모였다. 응수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절을 하고, 10살인 무순도 제사 마지막에 술을 올리며 절을 했다.

제사가 끝나고 만두전골과 온반과 막걸리를 나눠먹으니,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누군가 힘 좋은 동네 강서방과 한서방을 부르며 씨름을 해보라며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박수와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강서방과 한서방이 멋쩍은 표정으로 나오더니 금세 허리춤을 잡고 힘 싸움을 한다. 한서방이 강서방의 앞무릎치기에 휘청하더니 데구루루 구른다. 웃음과 박수 소리가 동네 어귀에 울린다.

 그 때 언덕 밑에서 일본 순사 2명이 장검을 차고 언덕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이모토 오우슈, 당신이 수릿날 제사를 치르라고 시켰는가?"

일본 순사부장이 취조실에 앉아 있는 최응수의 주위를 빙빙 돌며 말한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수릿날이 되어서 밥이나 나눠먹을 생각으로 ... ..."

최응수는 수릿날 행사를 사주했다는 죄명으로 읍내에 있는 경찰서로 붙잡혀 왔다.

"수릿날 행사를 금지한다는 천황폐하의 칙령을 거부하는 것인가?"

순사부장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내뱉었다.

"아니, 아닙니다, 저는 촌 구석에 있어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했다니, 게시된 공고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순사부장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 ..."

"고인동 공출이 너무 적게 책정된 것인가?" 혼잣말을 하듯 순사부장이 툭 던진다.

"아닙니다. 저희가 먹을 쌀을 조금 나눈 것입니다."

"대동아전쟁에 온 힘을 쏟아야 할 판에 술을 먹으며 히히덕 거리 다니, 조선 놈들은... ..."

최응수는 3일간 영창에 갇혀있다가 풀려났다. 응수가 그나마 짧은 시일 내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응수 동생 응만이가 쌀 20섬을 경찰서장인 스즈키 경부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스즈키 경부는 15섬을 조선총독부에 보내고, 5섬은 강계 경찰서에 있는 경찰 간부들과 나누었다.

최응수가 경찰서를 나오던 날, 순사부장은 "가족 잘 건사하고, 조상 주신 땅이라도 지키려면 매사에 조심하라"며 응수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1941 ~ 1945)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로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총력 동원령이 발표되어 강제 공출과 강제 노동력 징발이 자행되던 시기였으므로, 순사부장의 말은 비수와 같이 응수의 가슴에 꽂혔다.

집으로 돌아온 최응수는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더 이상 단지회에 자금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그의 다리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응수의 곳간은 그 해 여름 거의 바닥이 들어났다. 고인동에서 부담해야 하는 공출이 거의 두배 가까이 올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그 해 여름 응수는 단지회에 자금을 보내지 못했다. 이것은 1910년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씩 전달했던 지원금이 처음으로 끊기는 일이기도 했다.

응수는 일본 놈들의 눈치를 보며 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 굽실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개탄스러웠다. 밤마다 가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순은 아버지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일본 지리 교과서를 가슴에 끌어 앉고 방 구석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평온하다는 듯이 ~

 

<3화 끝, 4화 계속>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