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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2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2_5

by 조랑말림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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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 아니 수탈

최응수는 무순이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순이가 집을 나갔다고 ... ...' 동네 친구들 집을 찾아가고, 뒷산 시냇가, 선산 근처에도 가봤지만, 무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무순을 앉혀 놓고 조용히 응수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 놨어야 했는데, 응수는 급한 마음에 본인만 생각하느라, 정작 중요한 무순의 맘을 챙기지 못한 것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게 모두 다 무순을 위하고, 땅을 위하고,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인데 ... ..."

응수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두움과 적막함이 온 집안을 휘감고 있는 겨울밤, 아내 강희정은 아들 걱정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린다.

다음날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약간 기운 시점에 근창이 엄마인 이서방 부인이 최응수 집을 찾아왔다.

"큰엄매, 큰조캐가 아무런 이야기 없이 나갔다면서요? 걱정 마세요. 울 아덜하고 경성에 갔어요. 아덜이 경성에서 아반 만나서 같이 돌아온다고 했으니까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올 거에요"

강희정은 그 이야기를 듣자, 다행이다 싶다가도, 아무런 언질 없이 집을 나간 무순이 서운하기도, 또 그 추운 새벽에 집 나가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다.

최응수도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애먼 산만 바라본다.

 

무순이 집을 나간 지 열흘이 지났지만, 집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겠지 오겠지' 하며 기다린 날들이 길기만 하다. 일각이 여삼추 라더니 강희정의 마음은 하루가 일년 같다.

그렇게 무순을 기다리던 3월 중순 어느 날, 강계 읍내를 다녀온 응수가 집안에 들어서더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얼굴은 창백하고, 급체한 사람마냥 헛구역질을 한다.

"뭔 일 있어요? 무순이 소식을 못 들었어요?" 희정이가 응수를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가며 물어본다.

"... ..." 응수는 아무런 말이 없다.

다음날, 읍내에서 계몽요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소작농 한씨와 공산당원이라는 날카로운 눈매를 한 젊은 사내가 최응수를 찾아왔다.

"어제 농민대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토지소유증서를 전달하니 받으시오"

공산당원이 건넨 토지소유증서에는 최응수가 소유했던 땅의 30분의 1도 안 되는 농지에 대하여 무상으로 경작권을 부여하며, 그 외 농지는 임시인민위원회가 몰수하여 도인민위원회에서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분배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최응수가 비스듬히 몸을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산당원은 그 토지소유증서를 대청마루 위에 놓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강희정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땅문서를 왜 저들이 주는 거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공산당 놈들이 우리땅을 빼앗아 갔어" 응수가 얼굴을 숙이며 마지막 숨을 토하듯 한마디 한다. 응수의 몸이 휘청거리자 희정이 달려들어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희정은 응수의 얼굴이 갑작스레 늙어버린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응수를 방에 누이고, 돌아서자 눈앞이 깜깜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까!' 무순 보고픈 생각이 가슴 속에 피어 오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순과 근창은 경성 역사를 빠져 나오자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사람도 많고 인력거도 많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 매무새가 세련되어 보인다.

하늘에는 줄이 지나가고, 그 줄 밑으로 철길이 있다. 신기한 마음 철길을 따라가니 경성 전차 타는 곳이 나온다. 전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갔다.

 

동대문역에 내리니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경성운동장이다.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경성운동장을 뒤로하고 조금 걸으니 시장이 나타난다. 시장 앞쪽에는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쓰이는 벽돌이나, 쇠붙이들을 쌓아 놓고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책과 옷가지들이 좌판 위에 놓여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니 돼지고기 냄새, 한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도 나는 듯하다. 선농탕이라고 써있는 국밥 집이 눈에 들어온다. 무순과 근창은 선농탕 한 그룻을 뚝딱 비웠다.

"일단 아바지 자주 가시는 한약방에 가자" 근창이 국밥집을 나오면서 무순의 소매를 잡아 끈다.

" ~~ ?"

"아바지 어디 계시는지도 알아봐야 하니, 거기 갔다가 울 아반 만나러 가자"

"... ..."

무순은 근창이 아버지를 만나면, 금방이라도 집으로 끌려 갈까 봐, 경계심을 들어냈다. 근창이 저 만치 앞서가니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장 구경을 하며 뒤로 조금 쳐지는 듯 보이자, 근창이 달려와 팔짱을 낀다.

 

무순은 '배오개 한약방'이라고 적힌 한약방에 들어서자, 당귀, 천궁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근창이 강계에서 온 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하니, 나이 좀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빼꼼히 중문을 열더니 "이씨 아들인가?" 한다.

"네 어르신" 근창이 처음 본 것 같은 할아버지한테 씩씩하게 대답한다.

"이씨는 인천에 갔어. 물건 찾으러, 여기 다시 올지는 모르겠구먼, 우리하고 셈은 다 치렀는데." 할어버지가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말한다.

"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근창이 꾸벅 절을 하자. 중문이 스르륵 닫힌다.

"내일 다시 오자, 오늘은 경성 구경하고" 근창이 한약방을 나오면서 무순에게 찡긋거린다.

한약방을 나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니, 좀 으슥한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골목 한 구석에서 머리를 산발한 아이들 예닐곱이 따라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순과 근창을 빙 둘러쌓았다. 옷가지며 행색이 며칠은 씻지 못한 것 같다. 좋지 못한 냄새도 스멀스멀 풍긴다.

"어디 가니" 아이들 중 덩치 큰 아이가 입을 뗀다.

"너희 여기 아이들 아니지?"

"무슨 상관이야" 근창이 호기롭게 대답하지만 떨림이 느껴졌다.

무순 옆에 있던 아이가 갑자기 무순의 봇짐을 잡아 당긴다. 무순은 봇짐을 꽉 잡아 보지만 낚아채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힘을 주어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무순의 배에 주먹이 날라와 꽂힌다. 무순이 힘 없이 풀썩 넘어지며 봇짐을 놓친다.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놔. 쓸데없이 힘쓰지 말고"

근창이 덩치 큰 아이에게 달려 들자, 양쪽에서 발이 날아온다. 근창이 여러방을 맞고 웅크리자, 덩치 큰 아이 주먹이 근창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친다. 근창이 이빨이 부러지고, 코에서 피가 흘러 근창이 얼굴은 금새 피범벅이 되었다. 아이들이 잽싸게 근창 주머니를 뒤지더니, 잰 걸음으로 사라진다. 무순은 근창이 얼굴을 감싸 안으며 멍하니 멀어져 가는 봇짐을 바라만 보았다.

무순은 근창을 부축해서 '배오개' 한약방으로 돌아왔다. 달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약방 할아버지는 뒷방을 내어주며 근창을 치료해 주었다. 얼굴이 부어올라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된 근창이가 " ~ "하며 신음소리를 낸다. 무순은 쪼그려 앉은 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벌벌 떨고 있었다.

 

근창이 아버지는 일주일이 지나도, 한약방에 오지 않았다. 한약방 할아버지는 숙식 값을 해야 한다며, 신문 배달하는 곳에 무순과 근창을 소개해 주었다. 근창과 무순은 신문 배달과 한약방 허드렛일을 하며, 근창이 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근창이 아버지가 한약방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열흘 하고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5화 끝, 6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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