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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2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2_4

by 조랑말림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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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순아! 너 장가가니?" 근창이는 웃자란 까까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내리며 무순에게 말을 건다.

"... ..."

"너 정혼한 사람 집에 왔다고 동네 소문 다 났어"

"... ... 몰라" 무순은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어제 별채에 온 색시가 본인의 정혼자인 것을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최응수는 무순이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는 14살이 되자,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읍내에서 한약방 하는 현씨 둘째 딸을 데려왔다. 현씨에게는 납폐를 보낼 때, 20섬이 넘는 폐물을 같이 보냈다.

19458월 일본인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며,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일본이 빠져 나간 자리에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들어왔다. 소련군과 함께 한국독립군도 같이 들어왔고, 광복을 맞이한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독립군으로 북쪽에 온 단지회 동지 2명이 응수를 찾아왔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조직에 자금을 지원해 준 응수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안정적인 자금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수는 옛 동지를 만나 너무 기뻤다. 하룻밤 정담을 나누며, 회포를 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소련과 미국이 연합국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 중국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을 몰아내려 한다는 이야기 등을 들으니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두둑한 자금을 함께 들려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응수의 첫째 딸 숙자는 강계 읍내 국민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응수를 찾아왔던 단지회 동지인 장봉석이 숙자를 좋게 보았던지, 자신의 맏며느리로 달라고 했고, 그 해 가을 평양으로 시집을 갔다. 숙자 남편 장두호는 훗날 인민군 육군 소장까지 오른다.

소련 군정이 북쪽에 자리를 잡고,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는 소문이 돌고, 단지회 동지들 중심으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지는가 싶더니, 1946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는 등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있자니 응수는 하루라도 빨리 무순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가족도 지키고 땅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46년이 되자, 별일 없는데도 자주 읍내를 왕래하였고, 그 왕래의 결과로 2월 말 행실 바른 현씨 딸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3월 햇살 좋은 봄날, 길일을 잡아서 혼례를 치를 심산으로 최응수는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다.

 

무순은 집안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바지와 오마니가 자신 없는 곳에서 수근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집안일 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가 하면, 못 보던 사람들이 자주 집안을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무순은 무순의 정혼자가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황스러웠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나이도 많아 보였다. 집안일 하는 이에게 물어보니 무순보다 3살이나 위란다.

무순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모양새도 맘에 들지 않는데, 공부며, 친구며, 세상 구경이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 천지인데 갑작스런 혼례 라니, 그냥 그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외면하고 싶었다.

 

"순아 우리 남쪽에 한번 구경갔다 올까?" 근창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한다.

"남쪽에?"

"우리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니 너 혼례 치르기 전에 경성 구경 한번 해야 되지 않겠니?"

"... ..."

"난 갈 거야, 끼려면 끼고" 근창이가 입을 삐죽거린다.

"울 아반이 남쪽에서 물건 갔다 팔잖니, 아반이 그러는데 이 종이 하나 있으면 기차 타고 경성 금방 간데" 근창이가 영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쓰여진 종이를 내보이며 흔든다. '통행증'이라는 글씨가 언뜻 보였다.

무순은 갑자기 경성이 궁금해졌다. 큰 건물도 있고, 사람도 많고, 해외에서 온 물건도 많다고 들었는데. 무순의 가슴은 호기심으로 부풀어 올랐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무순은 눈을 떴다. 옆에서 근창이가 연신 창문에 머리를 찧는다. 무순이 세게 근창이 어깨를 한번 밀자, 근창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린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느라고 힘들었나 보다.

기차 창문 밖으로 눈을 돌리자 노을이 봉우리 사이로 넘어가고 있다. 붉은색인지 분홍색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빛깔을 구름에게 뿌려 놓고는 태양은 저 멀리 산밑으로 내려가려 한다. ‘산세가 낮아 보이네무순은 혼잣말을 했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느라고 무순도 피곤했다. 아니, 새벽녘 오마니가 사용하는 경대 서랍에서 20원을 훔쳐서 도둑 고양이처럼 나오는 것이 힘들었고, 그 보다도 아바지, 오마니 잠들기를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힘들었다.

무순은 기차값을 지불하고 남은 18원이 잘 남아있는지 손으로 봇짐을 더듬었다.지폐가 봇짐 밑에서 바스락거린다. 무순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눈을 감는다.

기차가 평양역에 도착했다. 무순과 근창은 만포선 완행열차에서 내려서, 서울로 향하는 경의선 완행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좀 먹을까?” 근창이 두리번거린다.어 둠이 깔린 평양역 환승장 이곳 저곳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것이 눈에 띈다.

아니, 기차 타면 잘 텐데무순은 봇짐을 꼭 쥐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경성역까지 가는 기차에 오르자, 무순은 안도감, 공허함, 미안함과 같은 여러 감정이 밀려옴을 느꼈다. ‘지금쯤이면 아바지하고 오마니하고 나를 찾겠다고, 동네방네 다니 시다가 집으로 돌아가셨겠지. 서울 잠깐 다녀온다고 적바림이라도 해놓고 나올 걸 그랬나!’ 기차가 또 다시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창아 너는 아바지한테 이야기 했니, 우리 서울 다녀온다고?”

아니근창이 슬쩍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오마니 한테 이야기했지, 아바지 만나러 간다고.”

어르신은 어디 계시는데?” 무순이 추운 듯 몸을 웅크리며 묻는다.

경성에 물건 하러 가셨는데, 나 보면 놀라시겠지. 올라갈 땐 아바지하고 함께 가자

무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성에 아는 이도 없는데, 일주일 정도 머물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앞선 까닭이다.

봇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눈을 감자, 잠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야아, !” 근창이 무순을 흔들어 깨운다. 오전 7시쯤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하자 기차 안 사람들이 분주하다.

순아 내려야 돼” “~~응 다 왔어?” 무순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났다.

내렸다가 다시 타야 돼"

무순이 정신을 차리고 바깥을 보니, 사람들이 줄 서서 개성역 안으로 들어간다.일부 사람들은 다시 나오기도 하고.

경성 갈 사람들은 통행증 보여주고 다시 타야 해

근창에게 이끌려 역 안쪽에 들어가니, 러시아 군인들이 길을 막는다. 통행증이라고 써있는 종이를 근창이가 내보이니, 나갈 방향을 손짓으로 알려 준다.

근창이 스빠시바라며 러시아말을 한다.

너 노어도 할 줄 아니무순의 말에 근창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기차가 개성역을 빠져 나오니 개성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집도 많고, 건물도 많고, 길에 인력거와 승합마차도 보인다. 기차가 좀더 속력을 붙이자 임진강과 한강이 기차 밑으로 지나간다.

남쪽은 강이 넓구나무순은 중얼거렸다.

덜컹거리던 기차는 아직 겨울 한기가 남아있는 2월말 오전 9시경 서울역에 도착했다. 신의주부터 먼 길을 온 기차도 힘들었는지 긴 숨을 내쉬는 듯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4화 끝, 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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