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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이야기_소설/최씨네 가족 이야기_2부

최씨네 가족 이야기 2_6

by 조랑말림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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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와 동지 그리고 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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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 보아라

경성에 있다는 전갈은 받았다.

몸 성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아바지와 오마니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당장 너를 만나러 가지 못하니, 고모집에 가 있거라

- 대전부 중촌정 대종로 663-7 번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평양에 있는 숙자네 집에 머물고 있단다.

이곳 일 마무리되면 지팡이를 짚고 서라도 너를 찾으러 갈 테니 조금만 고모와 함께 지내도록 해라.

자그마한 비녀를 하나 보내니, 고모에게 전해 주도록 해라.

                                                                                                  1946321  아바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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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반이 보낸 거야." 근창이 아버지가 무명천에 쌓인 비녀를 무순에게 내민다.

"북쪽 상황이 이상해, 토지개혁을 한다면서, 땅을 몰수하고 사람들한테 나눠준다는데, 가만 보면 땅은 지들이 가지고, 농사만 지을 수 있다는 구만. ... ... 큰아반도 그 때문에 평양에 갔는데, 시일이 좀 걸리는 모양이야"

"근창아 다친 데는 괜찮나?"

"네 붓기는 다 빠졌고, 멍 자국만 조금 남았어요. 아프지 않아요" 근창이가 아버지를 보자 신나서 목소리를 높인다.

"이곳 사람들 빠릿빠릿하니 조심해야 돼. 요즘 남쪽 오가는 것도 점점 깐깐하게 구는 것이 심상치 않아. 아바지 처럼 남쪽 물건 갖다 파는 것도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아. 이번에 올라가면 정리해서 니 어미하고 같이 내려와야겠어. 장사하는 치들은 남쪽으로 다 내려오고 있어"

"그럼 아바지 우리 어디 살아?" 근창이가 시무룩하게 묻는다.

"여기 경성이나 인천에, 인천에 봐 둔 곳이 있어" 근창이 아버지가 근창이 어깨를 다독이며 말한다.

"무순이도 여기 잠깐 근창이하고 있다가, 아제가 다시 오면 같이 대전에 가자 꾸나. 아제가 열흘 안에는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근창이 아버지가 부탁하 듯 무순을 쳐다본다.

"나도 대전 가도 돼" 근창이 재미있겠다는 듯 목소리 음이 높아졌다.

무순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된 일일까? 땅이 없어졌 다니' 무순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 어머니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최응수는 아내 강희정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첫째 숙자의 시아버지 장봉석은 사돈이자 응수의 단지회 오랜 동지로 지금은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독립 단체였던 단지회에 자금을 계속 지원 했었던 이력을 잘 설명하면, 땅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응수는 생각했다. 그러나 장봉석을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장봉석은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잡지 않다가, 응수가 평양에 간지 한달이 조금 넘은 4월 중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최응수는 한걸음에 평양철도호텔에 도착했다.

"잘 있었나 장동지!" 응수는 약지 손마디 잘린 왼손과 오른손을 같이하여 장봉석의 손을 덥석 잡았으나, 봉수는 잡힌 손을 한번 흔들고는 슬쩍 뺀다.

"무탈한 걸 보니 다행이네" 봉수의 말에서 따뜻함이 없다.

"... ... 내가 요즘 사정이 안 좋아. 그 공산당인가 계몽위원인가 하는 작자들이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우리 땅을 빼앗아 갔다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봉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말한다.

"목소리를 좀 낮추시게. 보는 눈이 많아"

"내가 그 동안 조직에 자금도 보내고... ..., 생색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몇 년을 꼬박꼬박한 것을 자네도 알지 않는가. 일본놈들이 가고 나니 이런 수모를 줘!!" 응수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알지, 알아 그런데 그 때 다 가명으로 하고 비밀리에 오갔으니,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요즘 일본놈들에게 협조하거나 부역한 것들은 시베리아로 끌고 가는 형편이니 자네도 조심해야 하네"

"그게 무슨 말인가?!" 응수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두호(장봉수 아들)에게 이야기 듣고 알아보니, 자네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기부한 내용이 나오더라고, 내가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생긴  일이라고 잘 얼버무리긴 했는데, 땅 찾으려 다가 자칫하면 반민족행위자로 몰리는 수가 있어. 조만식 선생(독립운동가) 1월부터 고려호텔에 연금되면서 우리 동지들 위상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고 말이야. 선생이 일본 첩자라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조만식 선생이야기를 하면서 봉수는 속삭이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세. 저들도 지금은 소련을 등에 업고 있으니 뭐라도 되는 것 같겠지만, 소련은 언젠가 떠날 사람들 아닌가."

장봉수가 서둘러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응수만 남았다. 응수는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1946 5월 중순 미 군정청은 38도선 무허가 월경을 금지하였다. 북위 38도선은 소련과 미국이 1945 8월 일본 항복 선언 직후, 한국을 나눈 기준 선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며 일본군 무장해제와 해당 지역 치안을 담당키로 상호 협의하였다. 1945 8월 소련군과 미군 주둔 초기에 38선은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하여 주요도로에 검문소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하는 정도로 운영하였으며, 사람들의 통행을 허용했었다. 그러다가 1945 8월말 경 소련은 공식적으로 38선을 봉쇄하며 통신, 물자 왕래 등 대부분을 중단시켰으나, 민간인의 통행은 그냥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다.

1946년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모두 빼앗아 가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여, 많은 지주와 종교인들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무순은 고향 강계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고향 땅도 빼앗기고, 부모님은 모두 평양 큰누나 집에 계시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으나, 2년이 지나가도록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무심하게 들려오는 소식은 미국과 소련의 사이가 좋지 않아 38선을 오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이야기(1947 4월 미군정은 38선 이남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모두 체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와 남과 북에 별도의 정부가 생길 수도 있다는 소문뿐이었다.

근창이 아버지는 강계에 있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는 아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서 인천에 거처를 정했고, 근창는 인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북과 남을 오가며 장사하는 아버지 수입이 꽤 쏠쏠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담아서 무순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 편지 어디에도 무순이 궁금해하는 고향 소식이라던가 무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무순은 아버지가 쉽게 고향 땅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북과 남을 왕래하는 일이 어느 순간 중단되면, 한동안 뵐 수 없다는 불안감에 잠을 뒤척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무순의 고모 최현미는 건강한 편은 아니었고 기침을 달고 살았다. 딸 둘이 있었으며, 무순보다 4 3살 누나였다. 고모부 김춘호는 일본 순사를 하다가 광복 이후 경사가 된 인물로, 무순이 고모 집에 머무는 동안 무순 앞에서 객식구가 생겼다며 투덜대기도 하고, 집안일 잘 못한다며 최현미를 타박하는 등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빨갱이 잡으러 다닌다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두집 살림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저녁에 야학에 다니고, 오전에는 신문 배달과 일용 잡부를 하며, 무순은 아버지한테서 소식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도 받을 수 없었다.

1948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9월에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더니, 남북교역중지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며, 남과 북의 교류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은 194810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반란 초기 경찰관과 그 가족 70여명이 살해 당하고, 이를 진압하고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 등으로 3천명 가까운 인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김춘호는 11월 좌익세력을 색출한다며 순천으로 출장을 가서 한동안 집안을 비웠는데, 그는 이듬해 3월 경위가 되어서 대전에 돌아왔다.

이 여순사건 이후로 남쪽은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었고, 19493월 북쪽과의 교역이 금지되었다.

19504월 봄, 최현미와 그녀의 첫째딸 김정희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괴질 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병에 걸려 최현미와 그의 딸이 설사와 구토 증상을 보이자, 김춘호는 의사에게 콜레라 증상을 알리고 둘째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 후 최현미와 그의 딸 장례식에 잠깐 얼굴을 내비쳤다. 무순은 고모의 장례가 마무리된 후 단출한 개인 물건을 챙겨, 근창이 있는 인천으로 갔다.

근창은 무순을 보자 즐거워했으나, 무순은 아버지에게서 연락도 없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다.

무순은 근창이 아버지가 하는 철물점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틸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18살 무순의 삶은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고된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6화 끝, 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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